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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원론, 이원론, 다원론의 고찰과 해체 주의와의 관계성

by 뮤랜이 2023. 6. 27.

일원론이원론다원론의고찰과해체주의와의관계성-텍스트이미지

 일원론과, 이원론, 다원론에 대하여 알아보고 다원론과 해체 주의와의 관계성을  근대건축 디자인관점으로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자.

1. 일원론

정의

 물질 또는 정신, 이들 중에 하나만이 유일한 실재성이라고 주장하는 철학적 체계를 말한다. 21세기의 디자인 가치는 과거 산업사회에서의 지나친 시장경쟁관계와 물질 중심적 사고를 초월하고 지구생태계와의 공존을 모색하기 위하여 다양한 인간가치의 창조의 노력은 물론 인간과, 인간환경 간의 참다운 소통과 통합적 가치를 중심으로 재 개념화 하여야 할 것이다. 일원론의 디자인원리는 1) 전체가 하나라는 인식하에 사물 간에 주체와 객체를 동일인 시 하며(통일의 사고), 2) 균형과 안정 속에 알맞음의 아름다움으로 사물들을 존재케 하며(조화의 사고) 3가지의 기본 원리로 구성된다.

 

 첫째, 일원적 디자인의 통일적 사고는 큰 하나라는 전체의 가치 속에서 이와 기, 무와 유 등 세부 요소적 가치들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 사고는 과거 산업사회시대에 디자인에서 보여 왔던 요소와 개인의 가치보다는 전체와 집단의 가치를 중시하는 것이고, 분석과 분리에 의해 사물을 해석하던 자세에서 벗어나 종합과 합일적 자세로 가치를 바라보는 것이다.

 

 둘째, 일원적 디자인의 조화의 사고는 전체나 통일 속에 내재해 있는 요소들 간에 어울리는 관계성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기준을 마련한다. 즉 조화의 디자인은 요소들 간에 어울림으로, 예를 들어 이와 기, 음과 양, 불 협과 조화, 자유와 규율, 자연과 문명, 형이상과 형이하, 역동적 균형을 의미한다. 조화적 디자인사고의 특징은 과거 산업사회의 경쟁과 차별적 가치를 초월하여, 동과 조화의 가치를 중시하며, 이성과 일방보다는 애정과 대화를 중시하는 것이다. 대비와 개체보다는 균형과 통합을 강조하며 궁극적으로 요소들의 가치 간에 알맞음의 상태를 강조한다. 그러나 정체나 고착된 조화가 아니라 치우침이 없는 영원한 새로운 창조의 과정을 뜻한다.

 

 셋째, 일원론적 디자인의 변화의 사고는 바로 엔트로피의 감소 즉, 규율과 절제와 축약과 정보의 효율을 바탕으로 아름다움의 창조를 본질로 삼는다. 일원론적 창조의 변화와 창조의 과거 산업사회의 폐기를 통한 새로운 창조의 개념에서 벗어나 절제와 순환적 개선의 개념이 강조되고, 이기적 욕망보다는 이타적 나눔이 강조된다. 또한 창조의 사고과정은 과거 산업사회의 귀납과 이성에 기초하기보다는 연역과 직관을 중시하고, 정해진 문제해결의 원리보다는 주어진 상황을 보다 중시한다.

 

 디자인의 궁극적 목표는 인간 삶의 아름다움이며, 나아가 일원적 디자인의 목표는 바로 생명성과 아름다움과 선의 추구이다. 일원적 디자인의 핵심을 이와 기의 가치가 큰 하나의 디자인에 통합되는 것으로서, 이는 곧 큰 하나의 태극적 디자인이라고 볼 수 있다. 21세기 디자인은, 일원로적 입장에서 그릇의 형태 디자인과 함께 궁극적으로 그 그릇을 인식하는 사고의 디자인에 보다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또한 디자인은 보이지 않는 비물질적인 형이상학적 가치에의 관심과 함께 보다 절제된 내면적인 삶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하여 디자이너는 상상력의 자유와 함께 절제와 축약의 유율적인 측면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2. 이원론

정의

두 개의 원리에 관련하는 모든 이론을 지칭한다. 데카르트의 경우에, 인간의 본성에 관해서는 영혼과 신체의 이원론, 정신의 기능에 관한 한에서 의지와 오성의 이원론을 구별한다..

 

 

 가장 많이 통용되는 대립은 인간과 세계의 대립이며, 정신과 물질의 대립이다. 이 점에서 모든 인간주의적 학설은 이원론적이며, 이 정도에서 인간의 자유를 확정하고, 또한 이 자유를 자연법칙들에 환원하기를 불가능하다고 하고, 또한 개인을 사회의 메커니즘 속에, 예를 들어 행정조직 속에, 흡수하게 하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한다.

 

 건축에서의 이원성은 일반적으로 모든 사물의 근본적인 속성으로서 하나의 존재물에는 그에 대응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상이다. 현대 건축에 있어 이와 같은 이원성은 양식의 변화로써 설명된다.. 이는 두 가지 요소가 동시에 존재하지 않고 대립 모순되면서 변증법적으로 존재한다는 서양의 이원론적 시각으로 볼 수 있다. 건축 양식의 이원성을 축소시켜 생각한다면 한 건축물에 표현될 수 있는 사고인 것이다.

 

 우리의 전통건축을 통해 볼 수 있는 이원론적 사고는 음양의 질서를 통해 알 수 있다. 건축에 있어 음양의 질서는 물질적인 것을 통해 밝히기보다는 공간을 통해 설명하려 한다.. 또한 이와 같은 질서는 다의성, 상대성, 상보성, 변화, 전일성 및 조화등과 같은 특징으로 인해 이원론적 사고를 포괄한다는 개념으로 일컬어진다.

3. 다원론

정의

 우주를 구성하는 실재성이 하나로 구축된 유일한 원리로 환원할 수 없다는 철학 체계를 말한다정치, 사회, 경제의 영역뿐만 아니라 문화 및 예술의 영역에도 다원론의 열풍이 거세다. 다원론은 일원론과 반대에 놓인 이론이다. 일원론이 진리가 하나라는 전제를 유지한다면, 다원론은 정답이 여럿일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일원론에서는 서로 다른 진리가 공존할 수 없다. 어떤 종교가 자신의 믿음만을 진리라고 생각하고 그와는 다른 형태의 믿음을 지닌 사람들을 모두 소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이 종교는 일원론적 종교이다.

 

 다원론에서는 서로 다른 믿음과 형이상학과 가치관이 지금 이곳에서 공존할 수 있다. 어떤 종교가 구원에 이르는 길은 다양하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종교에 사랑과 화해의 손길을 내민다면, 이 종교는 다원론적 종교이다.

이는 예술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예술 창작의 길은 하나이며 그 길 이외의 길을 걷는 예술가들은 사이비 예술가라고 비난한다면, 특정 양식만이 이 시대의 유일하게 올바른 양식이고 다른 양식은 퇴행적인 양식이라고 주장한다면,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유일한 답이 존재하고 그 답 이외에는 오답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일원론적 미학이다. 이와는 달리, 예술 창작의 길은 여럿이고, 특별히 올바른 하나의 양식이란 있을 수 없고,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여럿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다원론적 미학인 것이다.

 

 하지만 다원론에서는 모든 작품이나 모든 양식이 용인되어지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다원론은 자유주의의 연장선상에 있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으로 확대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무제한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은 아니다. 성인의 경우, 성인 개인의 자유는 그 개인의 자유가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 한에서 허용된다. 이 자유주의의 원리는 예술 다원론에도 적용될 수 있다. 어떤 작품이나 어떤 양식을 창조할 자유는 그 작품이나 양식의 창조가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 이상 허용되어야 한다. 다원론적 미학은 자유주의적 제한 내에서 모든 작품이나 모든 양식을 허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원론의 평가 기준을 알아보면,

 첫째, 평가 기준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다. 모방론, 표현론, 형식론 등은 하나의 평가 기준을 제시하지만, 다원론적 미학은 이 세 가지 기준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적 기준, 페미니즘적 기준, 프로이트적 기준 등 다양한 평가의 기준들을 인정한다.

 

 둘째, 다원론의 미학의 평가는 이러한 가능한 여러 평가의 기준들 중 일정한 기준을 선택하여 작품에 적용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셋째, 선택하여 적용된 일정한 기준 내에서는 작품들 간의 우열이 가려질 수 있다. 넷째, 다양한 기준 내에서의 평가가 좋다/나쁘다 식의 이분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주 좋다/좋다/그럭저럭 하다/나쁘다/아주/좋다/그럭저럭하다/나쁘다/ 나쁘다 식의 다분법으로 이루어진다. 그러한 미세한 차이를 가진 많은 작품들이 존재한다. 그러한 미세한 차이를 분별할 수 있는 평가가 더 섬세한 평가이고 더 정확한 평가이다. 이분법적 평가보다는 다분 법적 평가가 더 섬세하고 더 정확한 평가에 가깝다.

4. 다원론과 해체주의의 관계

 데리다가 말하는 해체는 단순한 파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데리다는 해체를 정의하는 데 있어서도 그의 해체주의를 적용시킨다. 그것은 해체가 조립의 반대말로서의 해체가 아니라, 그가 말하는 해체주의로서의 해체이다. 즉 차연 으로써의 해체인 것이다. 이것은 다원론과 연관되어 생각해 볼 수 있다. 해체주의는 일원론이나 이원론의 사고방식이 아닌 여러 the other의 개념을 보여주고 있다.

 

 즉, 정의된 하나의 그 외의 것을 다 포함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 자신을 통해 설명해 보면,, 내가 있다. 이것은 일원적인 사고이며, 나와 네가 있다. 이것은 이원론적인 사고이다. 하지만 다원론적인 사고와, 해체주의 사고는 나와 너의 그 외의 사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즉, 모든 사물이나 정의함에 있어서 일원적인 접근이나 이원론적인 접근이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다분법적인 방법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데리다 에 따르면 조립과 해체는 대립적인 관계라기보다는 상보적인 관계이다. 조립을 하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해체해야만 한다. 무언가를 해체해야만 조립이 가능한 것이다. 집을 짓는다고 하면, 그것은 모래로 구성된 바닷가의 해변과 산의 토양과 숲을 해체시켜야 집을 지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해체는 파괴가 아니라, 조립일 수 있다. 즉 해체는 조립의 조건이 되는 것이다. 그 반대로 조립은 해체의 조건이다. 즉 조립과 해체는 서로 상보적인 조건이 된다. 이것이 해체라는 용어가 단순한 파괴의 부정적인 의미를 넘어서서 긍정적인 다분 법적 사고로서의 모든 것을 포용하는 사상으로 이해될 수가 있는 것이다.

 

 기존에는 신이 나 이성 등에 의해 조립되어 있었다면, 그것을 질서라고 하였다. 질서는 차이와 구분에 의해 가능하다 서구의 철학자들은 질서의 구축을 위해서 사물과 언어, 존재와 표상, 중심과 주변 따위를 이원화했다. 데리다가 해체하는 것은 이러한 질서이고 이원화이다. 그는 이러한 이원화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으면, 바로 이것, 이분법적 대립을 없애고자 하는 것이 해체주의의 출발이다. 데리다는 질서의 기초에 있는 것을 비판하고 이원론을 부정하며 다원론을 중시한 것이다.

 

 

 이러한 질서에 대한 확신을 가진 사상 즉, 구조주의는 데리다의 해체대상의 주된 목표였다. 구조주의는 사회적 질서를 이루는 구조가 존재한다는 것이고, 구조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 중심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기둥이 없는 집을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구조에는 기둥과 중심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데리다 는 기둥이나 중심은 객관적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이 있다고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일 뿐이라고 한다. 이런 점에서 데리다의 해체주의를 탈구조주의로 본다. 그러나 데리다 는 구조주의만을 해체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데리다 는 모든 중심, 현존, 근원,근원, 이성중심주의를 해체하고자 했다. 이것이 그가 서구 철학 계를 뒤흔들 수 있었던 이유이다.

 

 서구 철학은 이와 같은 중심과 현존, 이성과 근원 같은 것에 의해 지탱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조건 다원론과 해체주의만이 관계성이 있는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원론이 나온 계기를 살펴보면 고대의 일원론적인 사상에서 그것은 하나가 아니라 어떤 대립적인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원론적인 사상으로 또한 그것은 두 가지의 대립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의 상호보완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시대적의 흐름에 따른 변화에 지금 현대 다원론적인 사고로 발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의 결정판이 해체주의 사상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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